우리나라 미혼 여성들에게
<결혼에 대한 공포>라는 주제로
설문 조사를 한다면
공포 대상 1위는 ‘시월드'가 아닐까 싶다.

결혼하기 전부터
엄마의 인생과 언니의 인생,
먼저 결혼한 여자들의 인생을 지켜본
한국 미혼 여성들에게
시댁이란 미지의 세계다.

마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귀신의 집처럼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에
입구에서 맴돌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결혼하기 전에
알지도 못하는 시댁에 대한
묘한 방어감이 있었다.

네이트 판에 올라오는 희귀한 사연들은
모르는 사람들의 일이니까
그럭저럭 넘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곧바로 좁은 부엌으로 직진하여
대가족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물론이고
식구들 밥 먹는 사이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두고두고 드실 김까지
구웠던 엄마를 보고 자랐다.

먼저 결혼한 친구는 결혼 전엔
라면도 제 손으로 끓여 먹을까 말까 하더니
명절이면 밤을 새워 갈비찜이며 6종 전을 만드느라
어깨가 뭉친다며 투덜댔다.

이런 풍경을 봐왔던 나는
언젠가 생길 시댁을 두려워하는 한편
내 시댁은 다르리라 확신했다.
그 확신은 지금 남편과 사귄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그의 부모님을 만나면서 생겼다.

때는 11월 말 추수감사절이었다.
미국에서 추수감사절은
가족이 함께하는 명절인데
나는 미국에서 가족 없이
홀로 보낼 예정이었다.

남편 입장에서는 혼자 있을 나도,
자기 부모님도 모르는 척할 수 없었을 거다.
그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모두 참석할 수 있는
추수감사절 파티를 마련했다.

나는 도토리 국수를 넣은
퓨전식 누들 샐러드를 준비했고
적당히 날씬해 보이는 원피스 위에
단정한 자켓을 입고 조금 일찍 도착했다.

남편의 부모님은 먼저 와 계셨는데
웃는 얼굴로 내 손을 꼭 잡으며
"만나서 반가워요, 얘기 많이 들었어요.”라고
환히 인사를 건네셨다.

부모님께서는 식사 내내 내가 가져온
누들 샐러드가 가장 맛있다며 많이 드셨다.
또 내게 호구조사 식의 질문은 일절 않으시며
부담 없는 대화를 이끌어가셨다.
불편할 수도 있는 자리였지만 참 편안했다.

 

 

12월 말인 크리스마스에는
시누, 그러니까 남편의 여동생에게
본가로 초대를 받았다.
2박 3일을 머물기로 했는데
이번에는 좀 긴장이 되었다.

남편보다도 더 미국인 같은 시누는
우리가 당연히 같은 방을 쓴다고 생각해서
손님 방 하나를 우리 두 사람이 쓰도록 준비해두었다.

남편은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한국에서 19살까지 살다가 온 나는
어른들이 계시는 집에서
결혼도 안 한 두 남녀가
뻔뻔스레 한방을 쓴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남편의 부모님은
그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셨다.
눈치 볼 필요 없이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시누 역시 나를 철저한 손님으로 대해주었다.
내가 음식 준비나 뒷정리를 돕겠다고 나설 때마다
손님이 무슨 소리냐며 손사래를 쳤다.

2박 3일 내내
친한 친구 집에서 쉰 듯 편했다.
이 사람들과 가족이 된다면
시댁 갈등은 없겠다고 확신했다.

시부모님은 권위를 내세우거나
체면을 위해 어떤 척을 하시지도 않았고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려 노력하셨다.

자식을 위해 젊은 시절을 열심히 사셨고
지금은 자신들의 행복을 찾으려 애쓰는,
상식적이고 좋은 분들이었다.

시누 또한 성격이 좋았다.
과도하게 꾸며대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선을 지키며 나를 대해주었다.

남편과 결혼을 결심하면서
나의 시월드는 드림팀일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 준비를 하면서
시부모님은 좀 이상하게 변하셨다.

시어머니는
“원래 남자 집은 이렇게 한다.”
“원래 여자 집은 이렇게 하잖아.”라는
말을 많이 하시기 시작했다.

내가 알던 이해심 많고
미국식 가정의 인자한 시부모님은
어느새 1970년대의 한국에 사는
어른들처럼 돌변했다.

딱딱한 호칭 대신
격식 없이 지내자던 손아래 시누는
결혼 준비에 참견 아닌 참견을 하며
본인 부모님의 뜻을 관철하려
호시탐탐 애를 썼다.

결혼식에서 시어머니는
결국 눈물을 터트리셨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엄마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중에 아들 결혼시킬 때
제 마음 이해하실 거예요.

나도 딸 시집보낼 때는
이렇게까지 아깝지가 않았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딸 주는 것보다
아들 주는 게 마음이 훨씬 아프네요.

친정은 남아선호사상 같은 게
전혀 없는 분위기여서
엄마는 기가 막혀 하셨다.
하지만 동시대를 살아온 여자로서
시어머니 마음에 공감은 못 해도
이해는 한다고 하셨다.

엄마는 시어머니가 아들에게
심적으로 많이 의지하시는 것 같다고,
네가 많이 이해하라고 말씀하신 뒤
한국으로 돌아갔다.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을
이역만리 타향으로 시집보내는 친정엄마에게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시부모님께 인사드렸을 때
시어머니가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이랬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우리 아들 부엌일은 안 시켰으면 좋겠다.
나도 안 시키고 키워서.”

나는 그 자리에서
죄송하지만 그건 안 된다고 말씀드렸다.

“부엌일 안 시키고 키우신 걸
제게 미안해하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집안일 안 가르치고 장가보내 미안하다고,
내가 못 가르쳤으니
너네는 서로 도와가며 살라고 하시기는커녕
부엌일 시키지 말라고 말씀하시니
저는 좀 황당합니다.

부탁이라고 말씀까지 하시는데
이렇게 답해드려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내가 이렇게 대답을 하니
시어머니는 뭔가 더 말씀하시려다
고개를 끄덕이셨다.

이후로 첫 2~3년간은
비슷한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고요한 싸움일 때도 있었고
설전을 벌이는 날도 있었고
남편에게 퍼붓는 날도 있었다.

언젠가 남편은 술을 잔뜩 마시고 와서
내게 하소연을 했다.
나와 시어머니의 갈등 때문에
자신이 그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며,
남편은 거의 빌듯이
네가 다 져주면 안 되냐고 말했다.

죽기를 바랄 정도라니
놀라기도 하고 마음이 아파서
나도 그러자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정말 어렵게 거절했다.

어른을 이겨 먹거나
우위에 서고 싶어서가 아니다.

어떤 관계든 정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쪽으로 쏠린 관계는 부당하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 가지고 갈 관계인데
그동안 부당함을 견디며
행복하게 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 이어 말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나는 그때 새로 생긴 가족에게서
느끼는 부당함을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이상한 논리로 넘기지 않았기에
참 다행이었다.

 


[실전 결혼] 시리즈
"결혼은 결코 로맨틱하지 않다!"
아티스트 심지아가 결혼하면서 겪게 된 에피소드를 전해 드립니다. 누군가의 솔직한 결혼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만으로도, 연애와 결혼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편집자: 홍세미)



필자: 심지아

뉴욕 거주중.
결혼 6년차, 엄마 3년차, 인간 40년차.
결혼생활 어찌저찌 유지중.
본업 아티스트, 부업 자유 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