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에디터의 변명

안녕하세요, 문형진 에디터입니다.
갑자기 웬 자기소개냐고요? ㅋㅋㅋ
오늘은 글의 종류가 좀 다르거든요.

연애의 과학은 본래
사람들이 연애를 더 잘할 수 있게 돕는다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는 서비스입니다.

에디터 개인의 생각보다는
객관적인 실험이나 연구결과를
소개하는 게 저희의 주된 일이죠.

하지만 오늘은 좀 특별하게,
저라는 에디터 개인이 어쩌다가
믿고 거른다는(?) 회피형 애착이 되었는지
조금 사적인 이야기를 해보려 해요.

 

안정형, 불안형, 회피형

연애의 과학을 한동안 읽어오신
독자님이라면 애착유형이란 개념이
이미 친숙하실 거예요.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한번 더 말씀드리면
애착유형이란 어릴 때의 영향에 의해
결정된 나의 연애·대인관계 유형을 말합니다.

애착유형은 대개
생후 12개월 안에 정해지며 특히
양육자와의 관계가 중대한 영향을 주죠.

(참고: 모든 사람의 연애 유형은 3가지로 나뉜다)

그 중에서도 회피형 애착을 가진 사람은
상대가 내 삶에 너무 깊이 들어오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가능하면 애인하고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해요.

실제로 저의 지난 연애를 돌아보면
물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가까운 것이
싫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저 자신이
갈려나가는 듯한 피로함을 느꼈답니다.

저는 왜 회피형이 된 것일까요?

 

토끼 귀를 한 어머니

사람은 남의 마음을 모르듯이
자기 마음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진짜 자기 마음을 알려면
남의 마음을 읽으려 할 때와 마찬가지로
열심히 추측을 해봐야 해요.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요 ㅎㅎ)

잘 생각해보면, 제 최초의 기억부터가
회피형 애착의 계기가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건 아직 제가 말도 못하는
아기였던 시절이었어요.

저는 지방의 어느 작은 아파트
거실에 앉아있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오렌지색 표지의
토끼 동화책을 앞에 놓고 저와 마주앉아
양손으로 토끼 귀 모양을 만들고 계셨죠.

아마 양손을 번갈아 움직이며
토끼 동요를 불러주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어머니는 그때 감정적으로
어딘가 무너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눈가에 아직 눈물 자국까지 남아 있었어요.

저는 어머니가 그럴 상황이 아닌데도
애써 즐거운 척 연기하며
저와 놀아주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아기였던 제가 느낀 감정은
가슴이 내려앉는 듯한
공포심이었어요.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 실제 감정이
다를 수 있다는 걸 인생 최초로
알게 된 순간이었던 거지요.

그때 저는 인간을 보이는 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깨닫게 된 게
아닐까 싶어요.

설령 그 대상이 어머니라고 해도요.

그렇게 그 장면은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제 최초의 기억으로 못박힌 거죠.

 

분리의 경험

꼭 이 기억만이 제 애착유형을
만든 것은 아니겠지만,

이처럼 아주 사소한 계기로도 아기는
중대한 인간 불신(?)을 경험합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세상에 와서
처음 관계 맺는 사람이고,
생애 초기 어머니와의 관계는
우리 삶의 틀을 대부분 결정해버릴 수 있어요.

그날 저는 “누구나 나를
속일 수 있다”는 두려움을
무의식에 새긴 것인지도 모르죠.

그럴 때 회피형 애착이 택하는 방법은
감정을 느끼지 않고
마음에 아무도 들이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아마 제 어머니는 그날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못하실 거예요.

그렇기에 제가 회피형 애착이 되었다고
부모님을 탓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세상 어느 누구도 아기에게
100% 완벽한 부모
되어줄 수 없으니까요.

아기는 양육자가 잠깐 밖에 나간다든가 하는
사소한 일을 마치 생존을 위협하는
방치나 학대처럼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설령 부모님의 잘못이 있었다 해도
그분들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예요.

게다가 저는 이미 성인이니
제 현재 마음 상태가 어떻든
그건 저 자신의 책임이라고 봐야겠죠.

 

연애의 모습

20대에 몇 번인가 연애를 했지만
대부분 1년을 채 넘기지 못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하나같이
예쁘고 선하고 다정하고,
제게 없는 무언가를 가진
반짝이는 사람들이었어요.

아마 문제는 저에게 있었을 겁니다.

제 연애의 특징은
거의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었어요.

애인에게 정서적으로
원하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죠.

전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즐겁고 평화로울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성숙의 증거라고 여겼어요.

그러나 애인이 저에게 뭔가
불만이나 바뀌었으면 하는 점을 말하면
저는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죠.

‘나는 너를 바꾸려고 하지 않는데
왜 너는 나를 바꾸려고 하지?
나는 네 영역에 들어가지 않는데
왜 내 영역을 존중하지 않는 거지?’

저는 연애가 두 사람이
서로 깊이 연루되고 간섭하며
바뀌어나가는 과정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예요.

제가 진심으로 누군가를 좋아할 때도
감정과 감정이 충돌할 때의 피로감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피로감은 제 마음 밑바닥에
자리잡은 두려움의 다른 얼굴인지도 몰라요.

누군가를 온전히 받아들였는데,
그 사람이 날 속인 거라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너무 큰
상처를 입게 될 거라는 두려움이죠.

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오래도록 쌓아온 마음의 벽은
이미 제 일부가 되었던 거예요.


(이미지=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지금은 다르냐? 하면
사실 지금도 그렇습니다… ㅎㅎ

한번 만들어진 애착유형은
쉽게 변하지 않아요.

성숙한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능력을 획득하는 것은
평생에 걸쳐 추구해야 할 과제랍니다.

(참고: 애착유형이 바뀌기 어려운 이유)

 

회피형 인생

한편으로는 제가 회피형 애착이어서
좀 불공평하게 이득을 본다는 생각도 들어요.

사람을 믿지 않아
미리 헤어짐을 준비하고 움츠린 탓에
상처를 별로 입지 않고 살았거든요.

물론 그만큼 다른 사람을 깊이 받아들이고
기대는 기쁨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만,
그건 어차피 한 번도 느껴본 적 없으니까
손해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한때는 제가 감정을 못 느끼는
사이코패스 성향이 있는지까지 의심했답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사이코패스도
영화관에서 <겨울왕국>을 보며
눈물을 뚝뚝 떨구진 않겠죠.

(엘사가 회피형 애착이라는 거
혹시 알고 계셨나요? ㅎㅎ)


(이미지=애니메이션 <겨울왕국>)

불안형 애착을 가진 사람들이 겪는
외로움과 고통을 생각하면
지금 혼자가 되어 경험하는
이 평화는 솔직히 만족스럽습니다.

한 가지 바라는 점이라면
언니네 이발관의 마지막 앨범에 실린
<누구나 아는 비밀>의 노랫말처럼,

저랑 똑같이 회피형 애착을 가진
누군가를 만나서
서로 간섭하지 않되 함께 걸어가는
그런 연애를 해보는 것이겠네요.

 

모두가 같지는 않겠지만

어떠세요?

어쩌면 신변잡기 같은 이야기인데...
조금은 참고나 공감이 되셨나요?

모든 회피형이 저 같진 않을 거예요.

회피형 애착을 가진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며 세상을 살고 있는지
잠깐 들여다봤다고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참, 혹시 본인이 회피형이시라면
지금까지 어떤 연애를 해오셨는지
댓글로 알려주시겠어요?

저도 굉장히 열심히 읽게 될 것 같거든요. ㅎㅎ

 

P.S.

본인의 애착유형을 아직 잘 모르신다면
연애의 과학 앱에서 애착유형 검사를 해보세요.

말씀드린 것처럼 나도 남들만큼이나
내 마음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애착유형 하나만 알아도 지금보다
훨씬 좋은 연애를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문형진 에디터의 후기

연과 에디터라고 다 연애를 잘 하는 게 아니었다는 충격적 사실… 저 말고 다른 분들은 다들 잘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