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결핍 같아요

30대 남성 L씨는
중요한 시험을 앞두고
심한 긴장 증세와 불안감이 생겨
정신과를 처음 찾아왔다.

치료 자체는 아주 간단했다.
불안을 줄여주는 약물을 통해
그는 긴장 증세 없이
시험과 면접을 잘 치를 수 있었다.

불안 외에 다른 증상은 없었고
더 이상의 치료는 필요 없어 보였기에,
나는 L씨에게 더 이상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는 예전부터
자신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었다며,
정신과에 용기 내어 들른 지금
그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애정결핍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과거 연애사를 들려줬다.

그는 이성과 한 번 사귀게 되면
최소 1년 이상 관계가 유지되었고
연애와 연애 사이에 틈이 짧았다.

그리고 연애할 때
연인에게 더 집중하느라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홀해지는 편이었다.

이별 후 솔로 기간을 견디지 못해
다시 돌아오는 그를
친구들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놀리기도 했지만
그의 좋은 사교성 탓인지 항상 잘 받아주었다.

그러나 즐거운 친구들과의 시간도 잠시,
짧은 쉬는 시간 후
다음 수업에 들어가듯
그는 금방 새로운 연애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이런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친구들과 다르게
연인 없이 혼자인 시간을 잘 보내지 못하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나에게 애정결핍이 있는 건가?’

 

과거의 경험 때문일까요?

[문제적 연애]를 읽어 온 독자들은
지금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혹시 어린 시절 L씨에게
결핍의 경험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런 의문은 나도 가졌고
L씨도 가졌었다.

그가 알기로 애정결핍은
과거에 결핍을 느꼈던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기에,
그는 자신의 과거를 열심히 돌아보았다.

하지만 혼자서 과거를 돌아보기가 쉽지 않아서
그는 진료실에서 답을 찾고 싶어 했다.

L씨는 7살 위의 형을 둔 막내로 태어났다.
따뜻한 성격을 지닌 부모님은
그에게 좋은 추억을 많이 남겨주셨다.

형과 마찰이 있을 때에도
부모님은 항상 어린 그의 편을 들어주었고,
그러한 상황을 무리 없이 잘 받아들인 형은
어린 동생을 예뻐해 주었다.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그는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도 아주 잘 지냈다.
동성과 이성 모두에게 인기도 많은 편이었다.

이렇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잘 자라온 그는
왜 스스로 애정결핍이라 여기는 것일까?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충분한 애정을 받으며 자랐는데도
왜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하는 것일까?

 

 

지나친 사랑이 독이 되는 경우

L씨의 심리는 지난 글에서
소개했던 A씨와 비슷하다.
(참고: 온전히 나만 바라봐주는 사람이 있을까?)

연애할 때마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격하게 소홀해진 이유에 대해
‘친구에게 전 여러 친구 중 하나일 뿐인데,
애인에게는 유일한 존재이니까요’라고 답했던 A씨.

특별한 관계를 원하는 심리를 소개한
그 글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어린아이에게는
‘온전히 사랑받는 경험’
그것이 계속해서 완전할 수는 없다는
‘건강한 좌절의 경험’이 필요하다고.

어린 시절 온전히 사랑받은 느낌이 부족하거나
건강한 좌절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그 시기를 떠나지 못하고 머물게 된다.

애정결핍뿐 아니라
과도한 애정의 경험 또한
아이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계속 애정을 바라게 만드는 것이다.

L씨의 경우가 이랬다.
그는 어린 시절에 받았던 사랑을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로 받기 원했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재 애정결핍의 원인으로
과거의 결핍만을 떠올린다.

L씨도 그게 고민이었다.
괜히 부모님을 의심하고
뿌리깊은 문제가 숨어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상담을 통해 L 씨는
자신이 과분한 사랑을 받았던 과거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을 깨달았다.

궁금증을 해결한
그의 표정은 아주 편안해 보였고
곧 치료를 종결하였다.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어요

그 후 몇 개월이 지나고
L씨는 나에게 메일을 보내왔다.

‘성인이 된 이후 처음으로
오랫동안 혼자인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처음에는 누군가를 꼭 만나야 할 것 같았어요.
혼자인 게 계속 불안했거든요.

하지만 과거의 연애 패턴을 끊기 위해 꾹 참았고
지금은 신기하게도 마음이 너무 편해요.
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고,
사이가 더 돈독해졌어요.

그 사이 썸 탈 것 같은 사람이 몇몇 있었는데,
서두르지 않았어요.

예전에는 혼자면 안 될 것 같은 불안감으로
급하게 연애를 시작했기에
항상 실패했던 것 같더라고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나와 맞지 않는 부분은 없는지 잘 살펴보지 않고
좋아 보이는 부분만 제 눈에 들어왔던 것 같아요.

이제는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으로
저에게 잘 맞는 사람을 찾아보려 하고
차분하게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어요.

제가 크게 깨달은 것은
선생님이 마지막 진료 때
말씀하셨던 부분이에요.

이런 저의 특성이 연애뿐 아니라
다른 대인 관계에서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돌아보라고 하셨잖아요?

저는 정말로 친구들 사이에서
혹은 회사에서조차
제가 사랑받아야 한다는 것
당연하게 여기고 있더라고요.

그렇지 못할 때 사람들에게 실망했고
저보다 더 주목받는 사람을 질투하기도 했죠.
참 부끄러웠어요.

이제는 저 말고 다른 사람에게
관심과 애정이 집중돼도
덤덤하게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저, 잘 할 수 있겠죠?’

그 후 더 이상 메일은 오지 않았지만
나는 L씨가 지금쯤
행복한 연애를 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니, 연애를 하지 않더라도
행복하게 지내리라 생각한다.

이전 글에도 말했듯
혼자일 때도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더 건강한 연애를 할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 연애란 어떤 의미였을까?
나에겐 연애가 왜 필요했던 걸까?
스스로 한 번 물어보기를 바란다.
앞으로의 더 건강한 연애를 위해서.

 


[문제적 연애] 시리즈
김지용 정신의학과 전문의가 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만드는 연애심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당신에게 꼭 필요한 솔루션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편집자: 홍세미)



필자: 김지용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팟캐스트 <뇌부자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