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는 결혼하면
당연히 아이를 가질 거라고 생각했다.
딸 하나, 아들 하나.
딱히 아이를 좋아하는 편도 아닌데
그냥 그렇게 해야 하는 줄 알았다.
다들 그렇게 사니까.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나니
아이 생각이 없어졌다.

남편도 나도 자기중심적이어서
아이에게 내 인생을 내어준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고,
주변 친구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변해가는 모습을 보며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늘 지쳐 보이는 표정과
육아에 맞춰진 편한 복장,
끊임없는 희생과 양보,
돈 걱정, 교육 걱정까지...
사는 게 영 팍팍하고 고되어 보였다.

한번은 친구와 함께 친구 아들을 데리고
하와이에 놀러 간 적이 있다.

바닷가의 멋진 바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칵테일도 마시고,
호텔 수영장 선베드에 누워
느긋하게 책도 읽고 싶었지만
헛된 꿈이었다.

삼일동안 뙤약볕 아래 모래밭에서
친구 아들은 모래에 구멍을 파고,
난 거기에 바닷물을 떠다 부었다.
플라스틱 양동이로 바닷물을 실어나르면서
아이랑 같이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내 인생의 일부만 나누어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눈 떠서부터 잠들 때까지 아니, 잠든 후에도
아이는 24시간을 점령했다.

‘그렇게 결국 내 인생을 다 가져가겠지.
난 그렇게는 못 해.’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남편에게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말했다.
남편은 언젠가 아이를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급할 것도, 확신도 없으니
뭐 어떻든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안 지나 몸 상태가 평소와 달라
확인해본 결과, 임신이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묘하게 반가운 느낌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불안감과 두려움이 무겁게 나를 눌러왔다.

혼자 망연자실 앉아있는데 남편이 퇴근했다.
“오빠… 나 망했어.”
라며 임신 테스트기를 내밀었다.

남편은 “오늘 만우절이야?”라고
어리둥절했다가 금세 나를 안아주었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될 자신이 없었다.
아니, 그냥 보통 엄마도 될 자신이 없었다.

나이가 서른을 훌쩍 넘었지만
내 인생도 아직 어찌할 바 모르는데
어떻게 누군가의 부모가 되고
한 인생을 책임진다는 건지.

눈앞이 깜깜하다는 말을 몸소 경험했다.
내 눈앞은 9개월 내내 깜깜했다.

 

 

임신해서 몸이 힘든 건 차라리 괜찮았다.
더 큰 문제는 내가 엄마가 될 준비가 안 됐고,
모성애가 부족한 여자라는 사실이었다.

행복한 얼굴로 배를 문지르고,
뱃속 아기에게 말을 걸고,
하얀색 아기 옷과 아기 신발을 얼굴에 부비는
그런 임산부들이 부러웠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뱃속 아기에게
말을 거는 것도, 태명을 부르는 것조차 민망했다.
태동을 느끼면 겁부터 났다.
행복감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내 몸에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 걸까.
거기 누구야, 너 거기서 뭘 하는 거야.’

출산하러 병원에 가서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임신은 축복이고 행복이라는데
왜 나는 전혀 고맙지도,
기쁘지도 않은지 고민해야 했다.

복잡한 마음만큼이나
괴로웠던 15시간의 진통 끝에
드디어 아이를 만났다.

처음 만난 나의 아이는
아주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늘 그리워했던 소중한 사랑처럼
너무나 반갑고 익숙했다.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내가 과연 얼마나 희생할 수 있을까?’

그렇게 오랫동안 해온 걱정은
그 얼굴을 보자마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나 하나 믿고 이 세상에 온,
내 작고 약한 친구.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지켜줄 거야.’

모든 게 두려웠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전투력 세계 1위의 전사가 된 듯
모든 게 자신 있고, 내가 누구보다
강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이를 키우면서 새롭게 깨닫게 된 건
육아도 주는 만큼 얻는다는 사실이다.

희생을 많이 해야 하는 만큼
엄청난 행복감을 얻는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행복감이란
내가 알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행복'이라는 단어로는 충분하지 않아서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야 할 정도로
그렇게 극도로, 미친 듯이 행복하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내가 사랑을
많이 줘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가 나에게 주는 사랑이
비교도 안 되게 더 컸다.

부모님이 내게 준 사랑보다
아이가 내게 주는 사랑이 더 크게 느껴졌다.

24시간 매일매일 나만 사랑하는 나의 아이.
나를 세상의 전부로 여기고
가감 없이 그 사랑을 표현하는.
이렇게 맹렬하고, 순수하고,
맹목적인 사랑을 주고받다니.
이런 인간관계가 가능하다니!

한때는 내 인생을 조금도
내어줄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젠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 있다.

나에게 아이 갖기를 권하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이가 없는 삶에는 자유가 있고,
아이가 있는 삶에는 행복이 있다.

나는 자유를 내어주고 행복을 얻었다.
그전에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부잣집 곳간에 쌀이 꽉 차 있듯이
아이가 주는 행복감이 내 삶에 온통 꽉 차 있다.

 


[실전 결혼] 시리즈
"결혼은 결코 로맨틱하지 않다!"
아티스트 심지아가 결혼하면서 겪게 된 에피소드를 전해 드립니다. 누군가의 솔직한 결혼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만으로도, 연애와 결혼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편집자: 구자민)



필자: 심지아

뉴욕 거주중.
결혼 6년차, 엄마 3년차, 인간 40년차.
결혼생활 어찌저찌 유지중.
본업 아티스트, 부업 자유 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