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정말 순진해. 

사랑을 그리도 믿는다는 게.”

언니는 한숨을 섞어가며 말했다.
잘 아는 유부남이
결국 상간녀의 집에 들어가
동거를 시작했다는 얘기였다.

아이를 둘이나 둔 그 남자는
며칠 전 언니가 자주 가는 일본 라멘집 앞에서
상간녀를 껴안고 쪽쪽거리다가
언니의 눈에 띄었다고 했다.

“그 여자도 처음엔 분명 자기가
그 남자 덕분에 '구원'받았다고 생각했을 텐데.”

“누구요?”

“그 유부남 와이프 말이야.”

“그랬겠죠...”

우린 96번가에 있는 카페에서
한참 동안 그런 얘기를 나누다가 헤어졌다.

홀로 작업실이 있는
67번가까지 걸어가는 동안,
나는 생각했다.

'나도 아직 사랑의 구원을 믿고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아무리 밝고 건강해 보이는 사람이라 해도,
유약하고 어두운 구석을 가지고 있다.

한번 빠지면,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그것은 실제로 겪은
어떤 일에 대한 생생한 기억일 수도 있고,
특별한 상황이나 감정,
혹은 그냥 악몽일 수도 있다.

그 속에서 사람은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자신의 한계에 부딪치면서
온몸으로 고통을 느낀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키웠던 강아지 밀키를
한국의 부모님 집에 두고 유학을 나왔다.

그런데 첫 학기에 밀키가 죽었다.
그게 2009년 봄이었다.

그때부터 2011년 가을이 될 때까지
1주일에 한 번은 똑같은 꿈을 꾸었다.

늘 어디선가 전화가 걸려온다.
사실은 밀키가 방금까지 살아 있었다고,
그런데 내가 오질 않아서
나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결국 방금 죽었다고.

나는 전화를 붙들고
통곡을 하며 미안하다고 울부짖다가
잠에서 깨어 난다.

늘 베개는 축축이 젖어있고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타지 생활 속에서 가장 외로운 밤들이었다.

하지만 2011년 가을,
신기하게도 남편을 만난 이후
나는 더 이상 그 꿈을 꾸지 않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사랑으로 구원받았다'라고.

남편은 나의 영웅이자
내 어두움에 불을 밝혀주는 가로등 지기,
그 축축하고 끈적한 곳에서
나를 건져내어주는 구원자였다.

그런 그와의 결혼식은
그간의 내 외로움에 안녕을 고하는
해피엔딩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채 2년이 지나지 않아
나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결혼 후 1년 9개월 만에
나는 엄마가 되었다.

임신과 출산, 육아는 
외롭고 고독한 싸움이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이
아빠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던 우리는,
총 한 자루만 쥐여준 채
전장에 내던져진 군인들과 같았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삶 속에서
서로를 적군으로 여겼다.
싸움은 멈출 줄을 몰랐고
나는, 또 그는 점점 지쳐갔다.

하루는 울고 보채는 아이를 재우기 위해
의미 없이 쇼핑몰을 거닐고 있었다.
정말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쇼윈도에 비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지만,
내 얼굴은 삶에 찌들고 지쳐 있었다.

그 순간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언어도 통하지 않는 외계에
아이 하나 안고 뚝 떨어진 여자.

그때 알았다.
나는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남편을 여전히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체 없이 "그렇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사랑이
나를 구원해주었냐고 묻는다면
나는 "구원받지 못했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가 나의 구원자가 되어주지 못했다고 해서
비난받을 필요는 없다.

나도 역시 그를 어둠 속에서
꺼내어 주지 못했으니까.

애당초 그는
24시간 나를 위해 대기 중인 구조대원이 아니다.
내 멋대로 그렇다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뿐.

사랑을 시작했다고 해서
더 이상 외롭지 않고,
인생이 구원받을 거란 보장은 없다.

그것은 완전한 별개로,
또 나만의 숙제로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외로움은 사랑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외롭지 않다 느낄 수 있는 것일 뿐.

나의 어두움에
불을 밝혀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내 인생의 구원자는
나 스스로일 수밖에 없다.

 


[실전 결혼] 시리즈
"결혼은 결코 로맨틱하지 않다!"
결혼 6년 차, 엄마 3년 차, 인간 40년 차 아티스트 심지아. 그녀가 결혼 생활 속에서 겪게 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가감 없이 전해 드립니다. 누군가의 솔직한 결혼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린 연애와 결혼에 대한 많은 깨달음을 얻어갈 수 있을 거예요! <실전 결혼>은 매주 토요일 저녁 연재됩니다.


 


필자: 심지아

뉴욕 거주중.
결혼 6년차, 엄마 3년차, 인간 40년차.
결혼생활 어찌저찌 유지중.
본업 아티스트, 부업 자유 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