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한다더니 어디 갔다 와?”

현관에서 마주친 남편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커다란 박스를 들고 있었다.

“나 스피커 샀어.
네가 계속 안 된다고만 해서 그냥 사버렸어.”

“뭐라고?!”

나는 깐깐한 공항 세관원처럼 팔짱을 낀 채,
당장 박스를 열어보라고 말했다.

그는 내 옆에 서 있던 딸을
물끄러미 한 번 쳐다보고는,
느릿느릿 박스를 뜯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스를 뜯는 동안 계속
스피커 구입에 대한 정당성을 토로했다.

“굉장히 작고!
좋은 나무로 되어 있어!
이 가격에 이런 물건은 아무 데도 없어!”

“됐고, 얼른 열기나 해.”

분위기를 알 리 없는 딸은
남편이 뜯어낸 뽁뽁이를 신나게 휘둘렀다.

박스에서 나온 스피커는
예상보다 훨씬 이상했다.

이마에 딱밤을 너무 많이 맞아서
머리통이 뒤로 5센치쯤 튀어나온 사람처럼 보였고,

무엇보다, 붉은빛이 강하게 도는 나무였다.
우리 집엔 붉은 계열의
우드 피니시 제품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어디에 두더라도 혼자 겉돌 게 뻔했다.

“이건 아니야.
얜 너무 못생겼어!
이건 정말 아니지!!”

“그냥 스피커야. 왜 그렇게 유난이야?”

나는 분하고 속상해서 발을 쿵쿵 굴렀다.

“오빠,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나더러 얘랑 같이 살라고?
소파에 앉으면 이게 나랑 마주보고 있어야 해!!
집안 정중앙에 이게 있단 말이야,

이렇게 중요한 일을
나랑 상의하지도 않고 저지른다는게
말이 돼?!!”

남편은 배신자였다.
작은 거실에 똥폭탄을 던진 비열한 배신자.

고집을 피울 때마다
눈과 입이 쪼끄매지는 남편은,
입을 거의 닭똥구멍처럼 오므리고서
스피커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내 비난 속에서도
묵묵히 설치를 다 마친 남편은
캐럴을 크게 틀고 설거지를 하러 들어갔다.

부엌 앞에 장승처럼 서서
화를 내는 나에게,
남편은 고무장갑을 낀 채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넌, 내가 하고 싶은건,
전부 다, 안된다고만 하잖아!”

부엌 문지방을 경계로
그도, 나도 절망했다.

이런 사소한 것들에서
절망감을 느끼는 것이 결혼생활이다.

나는 정말 이런 못생긴 스피커와
평생을 살아야 하는 걸까?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내가 너무나 싫어할 법한 물건이
거실 한 가운데 놓일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계속 생활해야 하는 걸까?

남편은 그 후로도 자주 그렇게 말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내가 다 못하게 막는다고.

나는 그 얘길 들을 때마다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음악을
차에서, 집에서, 또 침실에서
들어야 했던 지난 7년의 나날들을 떠올린다.

어색하기만 한 남편의 친구 모임에 따라가
미스코리아처럼 억지 웃음을 짓고,
결국 마피아 게임까지 해야 했던 날도,

차고를 “남자의 방”으로 만들고 싶다해서
궂은 날에도 비를 맞아가며
늘상 길에다 차를 세웠던 날들도 생각난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기억들이 훨씬 지배적인 것이다.

결혼을 하기 전엔,
만약 내가 이혼을 하게 된다면
그건 정말 커다란 사건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박이나 외도, 아님 폭행이라든가..

하지만 배우자가
그런 막가파가 아니라고 해서,
결혼이 동화책처럼
“Happily ever after”가 되는 것은 아니다.

결혼생활을 하면서 느껴지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감’은
아주 작은 것들에서 온다.

6년을 말했는데
여전히 열려있는 치약뚜껑을 볼 때,

끝 부분이 딱딱히 굳어진 그 치약을
매일 비틀어 짜낼 때마다,
나는 깊은 절망감을 느낀다.

나는 앞으로도 평생 이렇게 살게 될까?

깔끔하게 뚜껑이 닫힌 치약에서
말랑한 치약을 짜내어 이를 닦는 일은
이제 내 인생에 없는걸까.

아마 남편 역시
비슷한 종류의 절망감을
일상적으로 맛보고 있을 것이다.

우린 이런 문제로
함께 카운셀러나 가족상담 전문가를
찾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도움을 받아 불만을 해소하기도 하고
노력해보자는 다짐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게 가능할 거라는 믿음도 있다.
남편은 리즈너블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분명 며칠을 못 가
치약 뚜껑은 또 열려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절망감은 한층 더 깊어질 것이다.

그게 결혼생활의 진짜 모습이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아야만
내가 편안해질 수 있는 것.

반대로 말해보자면,
상대방을 배려하면
내가 늘 불편해하며 살아야 하는 것.

앞으로도
저 딱밤 맞고 뒤로 넘어가고 있는
못생긴 스피커를 볼 때마다
나는 또 절망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절망감들 속에서도
결혼은 유지가 된다.

상대도 나로 인해
절망감을 느낄 때가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서로를 측은히 여기기에.

‘그럼에도’ 결혼 생활은 유지될 것이다.

 


[실전 결혼] 시리즈
"결혼은 결코 로맨틱하지 않다!"
결혼 6년 차, 엄마 3년 차, 인간 40년 차 아티스트 심지아. 그녀가 결혼 생활 속에서 겪게 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가감 없이 전해 드립니다. 누군가의 솔직한 결혼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린 연애와 결혼에 대한 많은 깨달음을 얻어갈 수 있을 거예요! <실전 결혼>은 매주 토요일 저녁 연재됩니다.


 


필자: 심지아

뉴욕 거주중.
결혼 6년차, 엄마 3년차, 인간 40년차.
결혼생활 어찌저찌 유지중.
본업 아티스트, 부업 자유 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