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생각
연애의 주도권을 가지고서
자기 여자친구를 좀 무시하고
낮게 보는 남자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남자는 여자친구를 부를 때,
늘 이렇게 부릅니다.
“야!”
보통 연인들이 상대로부터 듣기 싫어하는 호칭이죠.
여보, 자기.. 좋은 애칭도 많으니까요.
우리는 보통 이런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요.
‘저 남자는 애인을 좀 무시하나 봐.
그러니까 저렇게 “야! 야!” 거리지’
남자가 평소 여자친구를 무시하니까
“야!” 라는 호칭을 쓸 거라는 거죠.
남자의 평소 태도가
언어 사용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지만 언어학자인 사피어와 워프는
조금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이름을 붙여
‘사피어-워프’ 가설이라고 하는데요.
쉽게 설명하면
“사고가 언어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언어가 사고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좀 더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이렇게 생각했다는 겁니다.
‘어느 날부터 이 남자는 별 생각 없이,
그냥 장난처럼 여자친구를
“야! 야!” 하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여자친구를
점점 아랫사람처럼 보고
무시하는 태도를 갖게 된 게 아닐까?’
생각 없이 쓴 “야!”라는 가벼운 호칭이
애인에 대한 남자의 태도를 바꿔 놓았다는 거죠.
나중에 생각하자 vs 나중이 어딨어?
에이, 어떻게 몇 번 “야”라고 불렀다고
태도나 행동이 바뀔 수 있냐고요?
그럼 케이스 첸이란 박사가
‘언어가 어떻게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는지’ 조사한
조금 특별한 연구를 살펴봅시다.
언어에는 크게 두 가지 구분이 있어요.
영어나 한국어 같은 미래 구분 언어에는
‘미래형 시제’가 있잖아요?
“will”이나 “be going to”처럼요.
첸 박사는 이런 나라에선
‘에이 나중에 생각하지 뭐’ 같은 생각을
훨씬 하기 쉬울 거라고 예상했어요.
언어 자체가 현재와 미래를 확실히 구분하고 있으니까요.
반면 중국어나 노르웨이어 같은 언어엔
이런 미래형 시제가 없습니다.
첸 박사는 이런 미래 비구분 언어를 쓰는 나라에선
문법상 현재와 미래를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미래를 ‘나중에나 찾아올 시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과 마찬가지’라 여길 거라고 추측했어요.
‘에이 나중에 생각하지 뭐!’ 같은 생각을
무의식중에 훨씬 덜 할 거라고 본 거죠.
실제로 두 언어권의 ‘저축률’을 비교해봤더니,
글쎄 미래형 시제가 없는 나라가
평균 5%나 더 많이 저축하고 있었다는 사실!
언어가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바꿨다는 거죠.
언어의 힘
문법적 차이와 저축에 대한 연구이긴 하지만
말이 태도에 영향을 끼친 건 분명한 것 같죠?
그럼 이론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우리 한번 생각해봅시다.
‘나는 애인을 뭐라고 부르고 있을까?’
‘애인은 나를 뭐라고 부르고 있을까?’
애칭을 쓰는 분들도 있을 거고
“야!”같은 호칭을 쓰는 분도 있을 겁니다.
물론 좀 억울한 분들도 계시겠죠.
별생각 없이 애인을 “야!”라고 부르지만
‘난 절대 애인을 무시하는 게 아닌데...’
하시는 분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건 애인을 “야!”라고 부르는 사람이
전부 나쁜 애인이다! 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 ‘별생각 없음’이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아무 생각 없이 쓰던 호칭 하나,
그냥 내뱉은 말 한마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애인에 대한 내 태도를
바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죠.
한 번쯤 되돌아보자
결혼 10년 차 연예인 부부가
아직도 서로에게 존댓말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참 보기 좋다’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평등한 존재로 생각하고
충분히 존중해주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남들처럼 편한 반말을 쓸 수도 있지만
그 부부가 10년이 넘도록 존댓말을 고집하는 건,
그 ‘존중’과 ‘평등’을 위한 노력일 겁니다.
반말을 쓰다가 나도 모르게
배우자에 대한 존중을 해칠까 봐서요.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꼭 이렇게 해라!”
“이렇게는 하지 마라!”라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꼭 애칭이나 존댓말을 쓰라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혼자서, 또 애인과 함께
한 번쯤 생각해보자는 거에요.
우리는 평소 서로를 어떻게 부르고 있었을까.
또 친구나 가족 같은
‘제 3자’ 앞에서 서로를 어떻게 지칭하고 있었을까.
평소 애인에게
별생각 없이 습관처럼 내뱉던 말은 뭐가 있을까.
아무 생각 없이 부르던 호칭, 내뱉던 말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태도를 바꾸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 떠올려보셨으면 좋겠어요.
애인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면 더 좋겠고요.
“말이 달라지면 행동도 달라질 수 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이치입니다.
분명 그 시간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는
소중한 기회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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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근함과 얕봄은 분명 다른 개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