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을 사랑해요

"선생님, 혹시 영화 중에
'아내가 결혼했다' 보셨어요?
아니면 드라마 '봄밤'은요?"

P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이야기를 이어갔다.

“둘 다 여자 주인공이 애인 말고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든요.
그런데 저도 그래요.
만나는 사람이 있는데도
또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가요.”

“그렇군요. 그럼 동시에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는 건가요?”

“네. 평소에 눈여겨 본 사람과
술자리를 갖게 되면 제가 여지를 주고...
가까워지다 결국 만남을 갖게 되는 식이에요.

그렇다고 원래 만나는 사람에 대한 마음이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각자 나름대로 좋은 거죠.
손가락질받을 일이란 거 아는데
마음이 마음대로 잘 안 돼요.”

P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표현은 어딘가 어색했고,
피상적인 데가 있었다.
'정말로 이 문제를 ‘문제’라고 여기는 걸까?'
하는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드라마 <봄밤>

 

P의 과거

P는 화려한 인상을 주는
3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충동적이며
자극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칭했다.

그러한 성향 때문에
그녀는 늘 과음과 과소비를 반복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성향은
타인과 맺는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듯 보였다.

단순히 동시에 두 사람을 만나는 것을 넘어
기혼 남성과 만나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사내에 소문이 난 탓에
곤경에 처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 관계를 쉽사리 끊어내지 못했다.

주말 부부였던 부모님은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관계가 소원했다.

아버지는 몇 번이나
외도를 하다 들켰지만
생활 능력이 없던 어머니는
아버지와 헤어질 엄두를 내지 못했다.

혼자 남겨진 어머니를 보며
그녀는 ‘사랑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사랑받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는 '연극성 인격'

P와 같은 성향을 지닌 사람을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연극성 인격’이라 부른다.

연극성 성격의 핵심은
사랑받고 싶은 욕구이다.
상대의 관심과 사랑을 얻기 위해
극적인 옷차림,
화려한 외양과 같은 수단을 쓴다.

유명한 정신분석가인 프로이트는
연극성 인격을 지닌 여성의 정신 역동을
아버지와의 관계를 통해 설명했다.

P의 경우처럼
아버지가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반면,
어머니는 그 권위에 짓눌려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경우에
아이는 남성을 강자로,
여성을 약자로 인식하게 된다.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인 아버지에게
미움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게 되는데,
이러한 아버지를 회유해서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귀여운 딸’의 역할을 연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성인기까지 굳어지면
외모를 화려하게 가꾸고,
깊은 사고보다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얼핏 보면 이성을 유혹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강자’였던 아버지,
나아가 남성에 대한 두려움이 깔린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남성으로부터 받는 사랑은 곧
불안 요소의 제거를 의미한다.

연극성 인격을 지닌 사람들은
성적으로 유혹적인 행동을 하지만
실제로는 남성이라는 존재와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탓에
사랑을 확인해 불안감이 해소되고 나면
관계를 단절하거나
새로운 관계를 찾아 나서는 경우가 많다.

P가 보였던 관계의 패턴
(여러 명과 동시에 관계를 맺는 것) 역시
한 사람과 깊은 관계로
발전하는 것이 두려워서
선택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

다른 한편으로 P의 심리는
공격자에 대한 동일시
(Identification with aggressor)라는
방어기제로도 설명해 볼 수 있다.

이는 무의식적으로
나에게 상처를 준 상대와
같은 역할을 선택함으로써,
피해자의 위치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시도를 의미한다.

P는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상처가 너무 컸던 탓에
피해자였던 어린 시절의 자신,
그리고 어머니와 같은 입장에
다시는 서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라는 말처럼,
자신이 스스로
외도를 행하는 사람이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다른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공격자가 되어버린 P의 마음 속에도
어린 시절의 아픔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소망이
자리하고 있을 수 있다.

그 사실이 P의 행동을 결코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씁쓸하고 안타깝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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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오동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소아정신과 전문의
연세온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팟캐스트&유튜브 채널 <뇌부자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