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진화론이 연애랑 무슨 상관인데요?
2편: 남자와 여자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
3편: 왜 남자에겐 바람둥이 유전자가 탑재됐을까
4편: 진화 관점에서 본 ‘여사친’이 위험한 이유
5편: 모든 남자가 바람둥이로 진화하지 않은 까닭은?
6편: 남자와 여자의 심리, 임신이 결정한다?
7편: 남자가 “너 걔랑 잤어?”라고 물어보는 이유
8편: 엄마 닮았는데도 '아빠 닮았다'고 하는 이유? ← 보고 계신 글

 

이번 연재 내내
남자는 씨를 뿌리고
여자는 임신을 한다는 차이가
남녀의 심리를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게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도 관련된 심리 실험을
한 가지 소개할게요.

 

○○ 닮았네!

신생아실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신생아를 보러 온 가족들이
하는 말을 관찰했습니다.

신생아실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아빠 닮았다’
‘엄마 닮았다’ 하는 말이겠죠.

 

 

우리는 엄마의 유전자 50%,
아빠의 유전자 50%를 물려받습니다.

엄마를 더 닮을 확률과
아빠를 더 닮을 확률은
50%로 똑같은 게 상식입니다.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릴게요.

① 아빠 닮았다
② 엄마 닮았다

둘 중 어느 말이 더 많이 나왔을까요?

놀랍게도 아빠를 닮았다는 말이
훨씬 더 많은 비율로 나타났습니다.

 

정말 내 아이일까?

이전 글에서
‘부성 불확실성’을 설명하면서
‘Mother’s baby, father’s maybe’
라는 속담을 소개해드렸습니다.

  • 부성 불확실성: 남성은
    직접 아기를 낳지 않기 때문에
    자식이 자기 자식인지 확신할 수 없음

(참고: 남자와 여자가 다른 근본적인 이유)

엄마는 아이가 내 자식임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에
가족들이 ‘아빠 닮았다’라고
말해도 딱히 불안하지 않아요.

하지만 아빠는 아이가
진짜 내 자식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기에
불안을 느낄 수 있어요.

주변에서 ‘아빠 닮았다’
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그 불안의 싹이 사라지지 않죠.

 

 

사람들은 이런 점을
느낌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아빠 닮았다’라고 말하도록
은연중에 압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생물학적으로는 50:50의 비율로
나와야 할 대답이 한쪽으로
치우쳐서 나타나는 거예요.

 

외할머니의 어시스트

이게 끝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은 흥미로운 의문을
하나 더 떠올렸습니다.

‘아빠 닮았다’라고 말하는 경향이
부계냐 모계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가능성은 없을까요?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로 나누어서
‘아빠 닮았다’와 ‘엄마 닮았다’의
비율을 조사해 봤습니다.

네 종류의 친척 중에서
‘아빠 닮았다’라는 대답 비중이
가장 높은 건 누구였을까요?

 

 

정답은 바로 외할머니입니다.

왜냐하면 외할머니의
부성 불확실성이 가장 작기 때문이에요.

외할머니의 경우
내 딸은 확실히 내 딸입니다.

내 딸이 낳은 손주 역시
확실한 내 핏줄이죠.

자신에서 자손으로 가는 과정에
불확실한 고리가 하나도 없어요.

반면 외할아버지의 경우는
아기가 내 딸의 자식인 건 확실하지만
내 딸이 진짜 내 딸인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불확실한 고리가 있죠.

 

 

외할머니가 ‘아빠 닮았다’는
말을 쏟아내는 것은 사실
사위에게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네 자식이 확실하니까
딴 생각 말고 잘 부양하라”는 거죠.

물론 의식적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아빠를 닮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 유전자에 새겨진 심리들은
대개 무의식 수준에서 작동하거든요.

그냥 ‘아빠 닮았네’라고 말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편향이 나타나는 거예요.

 

진화의 증거들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수컷은 암컷에 비해 다양한 짝을
만나려는 경향이 강했어요.

하지만 인간 아기에게는
부양이 필요하다는 특수한 사정 때문에
인류는 일부일처제로 수렴하는 양상의
진화 및 문화적 변화를 거쳐왔습니다.

신생아실에서 무심코 나오는
작은 말 한마디에서도
이러한 진화 과정이 드러나는 것이
신기하지 않나요?

진화 과정을 의식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진화는 우리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엄청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진화심리학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겠죠.

제가 정신과 의사로 일할 때도
진화심리학의 시각이
내담자를 이해하는 데
무척이나 큰 도움을 주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