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띵언
얼마 전 모 대학교
대나무숲 페이지에
이런 게시글이 올라왔습니다.
아마 이 문장이 눈에 익은 분들이
많으실 거예요.
“정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헷갈리게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연애에서
진리처럼, 명언처럼 떠받드는 말인데…
이거 정말 믿어도 괜찮을까요?
뭔가 꺼림칙하진 않으신가요?
사실 이 말은 믿어도 되기는커녕
완전히 틀린 말입니다.
지금부터 그 이유를 설명드릴게요.
수동적인 연애
이 말은 “헷갈리게 하는 사람은
널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빨리 버려!”라는 뜻이죠.
여기에는 상대의 마음에 따라 내 행동을
결정하는 게 좋다는 전제가 숨어있습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할 때만,
그리고 그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만
나도 상대를 좋아해도 된다는 거죠.
이게 무슨 말이냐면
절대 상처 입을 위험을
감수하지 않겠다는 뜻이에요.
이 말을 믿기 시작하면
내가 어떤 능동적인 행동을 취해서
상대의 마음을 바꿀 가능성을
만들어내지 못하게 됩니다.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도
내가 더 이상 헷갈리지 않을 만한
'확실한 증거'가 나타날 때까지
아무 행동도 할 수 없게 되죠.
연애는 하고 싶은데 스스로
자기 손발을 묶어놓은 거예요.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점쟁이를 찾아가든지
뒷마당에 물 떠놓고
기도하는 일만 남습니다.
“정말 좋아하면 헷갈리게 하지 않는다?”
이 말은 얼핏 보기에는 무척 쿨하고
능동적인 말처럼 보이지만,
결국 여러분의 주도권을 빼앗고
극도로 수동적인 위치로
밀어넣는 말이라고 보시면 돼요.
진리의 사바사
문제는 이뿐만이 아닙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모든 사람이 이성을 좋아할 때
똑같이 행동하지는 않거든요.
실제로 진심으로 좋아하는데도
상대를 헷갈리게 만드는 유형의
인간들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습니다.
(많다는 거지 좋다는 뜻은 아니에요)
세 가지 예를 들어볼게요.
1. 연애 경험이 적은 경우
이 경우는 설명할 것도 없겠죠?
말 그대로 연애 경험이 적어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 직접 겪어봐서
아시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2. 자존감이 낮은 경우
최근 연애에서 큰 상처를 받았거나
어떤 이유로 자신감이 부족한 경우,
상대를 진심으로 좋아해도
제대로 다가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사람들은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친근하게 굴면서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도리어 퉁명스럽게 대하기도 하죠.
3. 회피형 애착유형을 가진 경우
애착유형은 어릴 때 양육자와의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대인관계 유형을 뜻하는데요.
크게 안정형, 회피형, 불안형의
세 가지로 나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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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모든 사람의 연애 유형은 세 가지로 나뉜다)
회피형은 친밀한 관계를 부담스러워해서
상대와 너무 가까워진다 싶으면
본능적으로 거리를 두죠.
그런데 회피형 애착을 가진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면?
다가가고 싶은 마음과 멀어지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면서 굉장히 이상한 태도를
취하게 되기도 한답니다.
흐...흥! 딱히 네가 좋아서 그런 건 아니라구
(참고: 그 에디터가 회피형이 된 이유)
남의 신발 신어보기
“좋아하면 헷갈리게 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가정은
터무니없어요.
멀리 갈 것도 없이
여러분은 어땠는지 한번 돌아보세요.
여러분은 누군가를 좋아할 때
상대가 헷갈리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관심 표현을 하시나요?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이유는 뭔가요?
진심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요?
당연히 이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대개 호감 표현이 어려운 이유는
거절이 두렵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여러분이 거절이 두려운 것처럼
다른 사람도 거절을 두려워한답니다.
(참고: 솔직한 감정 표현이 어려운 이유)
그러므로 헷갈리지 않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현하는 건
누구나 하는 일이 아니라
아주 특별하고 용기 있는 일인 거예요.
저 포도는 신 포도다
“정말 좋아하면~”이라는 말은
왜 이렇게 널리 유행하게 된 걸까요?
사람들이 이 말을 믿고 싶어하는
이유는 사실 쉽게 이해가 됩니다.
원하는 관계가 잘 안 됐을 때,
혹은 잘 안 될까 봐 불안할 때
그 책임을 전부 상대에게
떠넘겨버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나는 저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저 사람은 날 헷갈리게 하는데
그건 날 진짜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거든.”
이 말은 아래와 같이 해석할 수 있어요.
“나는 저 포도를 따지 않을 거야.
저 포도는 따기 어려울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데
그건 포도 맛이 시다는 증거거든.”
포도가 달린 위치와 포도 맛이 무관하듯
그 사람이 나를 헷갈리게 하는 것과
호감 여부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헷갈린다는 이유만으로
가능성이 있는데도 지레 포기해버리면
잠깐 마음이 편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나에게는 평생 땅에 저절로 떨어진
포도알만 주워먹는 선택지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물론 가만 있어도 포도알이 후두둑 쏟아지는
뛰어난 매력의 소유자라면
어떻든 상관없으시겠지만…
우리 대부분이 그렇지 않다는 건
여러분도 알고 저도 알고 모두 다 알죠. (ㅠㅠ)
어차피 모른다
그러면 헷갈릴 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면 좋을까요?
일단 “정말 좋아하면
헷갈리게 하지 않는다”는
말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리세요.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독심술사가 아닌 이상
모르는 게 정상이에요.
인간 관계는 원래 그렇게 불확실한 거예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거 다들 아시잖아요.
그 불확실성을 받아들이고
힘들더라도 나의 불안을 직시해야만
성숙한 연애를 하실 수 있어요.
저는 이렇게 권해드리고 싶어요.
상대의 마음을 알아보려고
부질없는 노력을 쏟으시기보다
나 자신의 솔직한 마음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는 거예요.
상대방의 마음이 아니라
내 마음을 기준으로
판단을 내리시라는 거죠.
내 마음이 진심이라면?
용기를 내서 먼저 행동에 나서보세요.
내 마음이 그저 그렇다면?
한동안 상황을 지켜보면 됩니다.
이렇게 하시면 한없이 어렵기만 하던
연애도 한결 쉬워질 거예요.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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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진 에디터의 후기
사실 저는 포도 재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포도 위치와 맛이 상관이 있으면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