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다닐 무렵에는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와
헤어지기 아쉬워서
버스가 끊기기 전까지
집 앞 골목길을 돌고 또 돌았다.
마지막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뛰는 와중에
자꾸만 나를 돌아보는 남친을 보면서,
‘결혼한 사람들은 좋겠다.
헤어지지 않고 늘 붙어 있고
한집에 살 수 있어서!’라는
생각을 수백 번 했다.
그리고 결혼을 하니 정말 그랬다.
남편과 매일 저녁
헤어지지 않아도 되니 기뻤다.
물론 결혼 전에도
우리는 서로의 집에 자주 놀러 갔지만
집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눈 맞추며 밥을 먹고
같이 잠들어 같이 눈을 뜨고
주말이면 장을 보러 가고
화장실 앞에 어떤 러그를 깔지
함께 고민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집에 사는 것이
행복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한 집 살이가
언제까지나 로맨틱하지는 않았다.
어느 순간 나는 알아채 버렸다.
이 집에는 나만의 공간이 없다는 것을.
어쩌다 남편이랑 다투고 나면
나는 부엌에 들어가 서 있었다.
‘그전에는 없던 버릇인데
왜 내가 부엌에 서 있지?’ 싶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넓은 집에서
나만의 공간이라 여겨지는 공간이
부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집안의 모든 곳은
나의 장소이기도 했지만
남편의 장소이기도 했다.
온전한 나만의 장소가 없었다.
학생일 때는 내 방이 있었고
유학을 온 후로는 내 집이 있었는데,
이제는 내 방이 그의 방이었고
내 거실이 그의 거실이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추잡하거나 은밀한 행동을
즐길 장소가 없었다.
다리털 한 개씩 뽑으면서
휴지 위에 정렬시켜놓고
쾌감을 느끼거나
뱃살을 태워준다는 핫크림을
배에 잔뜩 바르고
티셔츠를 올린 채 소파에 앉아
TV를 볼 수가 없었다.
물론 이런 모습은 남편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지만.
나는 우리 집이
나만의 집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금방 깨우쳤다.
남편에게도 이곳은 자기 집이기 때문에
아무 때나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문을 따고 들어왔다.
집에서 나의 자유나 사생활이
100% 보장되는 시간이나 장소는 없었다.
한번은 남편과 크게 싸우다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차 열쇠를 들고 뛰쳐나왔다.
남편 꼴이 너무 보기 싫어
친구를 불러내서 밤새워 놀다가
들어갈까 싶었는데
금세 마음을 접었다.
이런 일을 친구에게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괜찮은 척할 자신도 없었다.
결국 혼자 동네 몇 바퀴 돌다가
동네 주택가에 차를 세워 놓고
한참을 혼자 앉아 있었다.
그날은 계속 혼자 있고 싶었지만
어쨌든 나는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한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아
떠들썩하게 결혼식을 하고
평생을 약속한 남자가 있는 집으로.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가장 같이 있기 싫은 그 남자.
말하고 싶지 않은 피곤한 날에도
자꾸 말을 거는 남자.
내가 아끼느라 남겨둔 마지막 디저트를
아무 생각 없이 먹어버리는 남자.
수건을 예쁘게 줄 맞추어 걸어두고 싶은데
꼭 한쪽이 축 늘어지게 걸어두는 남자.
유럽 여행 가서 사 온,
자수가 놓인 린넨 쿠션을 마구 꾸겨서
땀 묻은 머리로 베고 눕는 남자가 있는 집으로.
어떤 방송인이 TV 프로그램에서
이런 농담을 했다.
“제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여자친구가 영영 집에 안 가는 게
무서워서예요.”
그런데 그 일은 실제로
내게도 일어나고 있었다.
내 남친은 영영 집엘 가지 않았다.
이에 대한 불편함과 답답함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에 나는 점점 익숙해졌다.
내가 일을 다시 시작하면서
창고로 쓰고 있던 방을 비워
내 작업실로 만들었다.
일하든 하지 않든
정해진 시간엔 한 평도 안 될 듯한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말없이 불쑥 들어오는 남편에게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남편은 내게
“왜 꼭 노크해야 해?
일하고 있었어?”라고 물었다.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혼자 있었다고 대답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
하는 표정으로 남편을 바라보면서.
결혼한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혼자 있고 싶음'은
특히 아이를 낳으면 더 증폭된다.
나는 아직 이 문제를 해결할
완벽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작업 공간을 따로 만드는 것처럼
여러 가지 시도를 하는 중이다.
아직 미혼인 사람들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게
언제나 좋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거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면서
분명 따듯하고 안전함을 느끼고
고독을 잊게 되지만
철저히 나 혼자가 되는 시간은
어쩔 수 없이 잃게 된다는 것 또한
숙지해야만 한다.
[실전 결혼] 시리즈
"결혼은 결코 로맨틱하지 않다!"
아티스트 심지아가 결혼하면서 겪게 된 에피소드를 전해 드립니다. 누군가의 솔직한 결혼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만으로도, 연애와 결혼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편집자: 홍세미)
필자: 심지아
결혼 6년차, 엄마 3년차, 인간 40년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