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다를 줄 알았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죠?
이번 사람은 정말 믿었는데…
이젠 사람 자체를 못 믿게 될 것 같아요.”
P씨는 진료실 의자에 앉기도 전에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2달째 상담을 이어가던 P씨는
이전 연애의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또다시 ‘나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반복해서 나쁜 사람을 만나는 연애 패턴은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알코올 중독인 남편으로부터
시달리다가 겨우 이혼을 했는데,
이번 연인 역시 술 문제가 반복되는 상황.
그런데 사실은 그녀의 아버지 또한
알코올 문제가 있었더라는 식의 이야기.
정신과 의사가 되기 전에는
‘참 운이 없는 사람이네.’라고만 생각했다.
간혹 작가의 억지 설정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하지만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실제로 드라마 같은 일을 연속해서 겪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고통을 되풀이하는 심리
이들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심리가 관찰되는데
바로 ‘반복 강박’이다.
프로이트가 처음 제안한 이 심리 현상은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상황을
반복하고자 하는 강박적인 충동을 뜻한다.
충동이라고?
너무나 아픈 이 상처를,
내가 스스로 선택해서 반복한 것이라고?
내가 환자들에게
반복 강박에 관해 설명하면
항상 돌아오는 질문이다.
하지만 다시 마주하기 싫은 상처를
스스로 반복하는 것은
생각보다 꽤 흔한 일이다.
예를 들어
트라우마가 있는 많은 아이들이
상처받았던 상황을
반복해서 그림으로 표현한다.
누가 그리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생존을 위협받던 기억일 텐데,
아이들은 왜 자꾸 그 장면을
그려내는 걸까?
또한, 극복하기 어려운
신체적 혹은 정신적 사고를 경험한 사람들은
꿈에서 사고 장면을 반복한다.
악몽뿐 아니라 깨어 있는 시간에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순간들이 머릿속에 스쳐 간다.
너무나 지우고 싶은데,
왜 자꾸만 떠오르는 걸까?
상처는 무작정
덮는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무의식은
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어떻게든 지우려고 노력한다.
놀랍게도,
반복 강박은 과거의 상처를
해결하려는 방법 중 한 가지다.
반복 강박의 원리
그들이 맨 처음 겪었던 첫 번째 상처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알코올 중독, 학대와 방임,
외도하는 부모님을
어린 그들은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 상처받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애인이 나쁜 사람이라는 의심을 하기도 전에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과정이 수동적으로 이루어졌다.
상처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 후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무모한 도전에 뛰어든다.
바로 과거와 비슷한 상황을 연출하고
이전과는 다르게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인 첫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웠다면
그 후 비슷한 애인을 만나,
그를 바꾸려 하거나 그와 좋은 관계를 맺어
이전 상처를 씻어내려는 것이다.
하지만 매우 안타깝게도
이런 반복 강박을 통한 시도는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문제는 나에게 있기보다
상대에게 있는 경우가 많으며,
스스로 바뀌기도 어려운데
상대를 변화시키기란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반복 강박에 관해 설명하면
놀라며 인정하는 경우도 많지만
모든 사람의 반응이 같지는 않다.
이전 연인의 주사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고생했던 P씨는
이번에도 주사가 아주 심한 연인을 만났다.
P씨는 상처가 반복되는 것이
자신의 선택이라는 나의 해석에 저항했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우연 혹은 운명 탓으로 돌렸다.
“제가 이런 사람인 줄 알고 만났겠냐고요!
처음 만날 때는 술을 마시지 않았어요.
아무리 봐도 전 그냥 운이 없는 것 같아요.”
정면돌파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P씨는 문제를 인지하고
어느덧 2달이 지났는데도
그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반복 강박 심리의 진정 무서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또다시 상처받을 거란 사실을 알아채도
그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내 의식을 조종하여
그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할 수 없는
온갖 이유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결국 또 상처받게 한다.
물론 반복 강박 하나로
힘든 연애를 반복하는 이유가
모두 다 설명될 수는 없다.
나쁜 사람만 만나게 되는
또 다른 이유에 대해선
다음 글에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러나 그전에
혹시 내가 나쁜 사람만 반복해서 만난다면
‘반복 강박’이라는 돌격대장이
내 연애를 지배하고 있는 건 아닌지 살펴보자.
과거의 상처에 꼭 정면으로 도전하느라
현재의 시간도 괴롭게 만들 필요는 없다.
매번 말하듯,
연애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문제적 연애] 시리즈
김지용 정신의학과 전문의가 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만드는 연애심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당신에게 꼭 필요한 솔루션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편집자: 홍세미)
필자: 김지용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정회원
팟캐스트 <뇌부자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