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씨의 고민
“남자친구가 집착이 심해요.
문자 하다가 답장이 조금만 늦어도
곧바로 전화를 할 정도로요.
한 번은 싸우고 나서 전화를 꺼 버렸는데,
제가 연락이 안 된다면서
제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을 다 돌린 거예요.
영상 통화까지 걸어
저랑 같이 있는 거 아닌지
확인 시켜 달라고 했대요.
사람들에게는 제가 혹시 나쁜 생각 할까
걱정된다고 둘러대고요.”
“너무 화가 나서 헤어지자고 했더니
자기가 배신당한 경험이 여러 번 있어서
사람을 잘 못 믿는다고, 잘못했다고 울더라고요.
저 아니면 자기 받아줄 사람 없다는데
어떡하겠어요."
A씨는 잠시 망설이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그 사람 상처를 낫게 해줄 수 있겠죠?”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
A 씨의 남자친구처럼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있는 사람은
새로운 관계를 통해
그 상처를 극복할 수 있다.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주는 누군가를 만나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배신의 상처는 조금씩 흐려질 것이다.
상대방이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으면
집착은 줄어들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기반한 신뢰가
그 자리를 채우니까.
A 씨와 남자친구는 이러한 단계에 도달해
오랫동안 행복하게 지낼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상적인 결말을 위해선 전제 조건이 붙는다.
남자친구가 아무리 의심을 하고,
집요하게 연락을 요구하더라도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고
‘나는 너를 변함 없이 사랑한다’라는
자세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쉬울까?
오늘 하루 동안 그가 원하는 대로
여러 번 연락을 한다고 해서
그에게 A 씨에 대한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
순간의 불안감은 덜 수 있겠지만
내일 똑같은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90% 이상이다.
일주일 후에도,
한 달 후에도 같은 일은 반복될 것이다.
이 과정은 충분한 시간을 필요로 하며,
헌신에 가까운 노력을 계속해서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구원하고자 하는 욕구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느낌을 버텨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일이다.
그 과정에서 끊임 없이 상처를 받고
'이젠 지쳤다'는 느낌을 받게 될 수도 있다.
내가 받는 상처를 감내하면서
상대에게 맞출 필요가 있을까?
상대방의 마음 속 상처가 옅어지는 대신
내가 고통을 겪고, 나를 잃어버리기까지 한다면
당연히 관계를 정리하는 게 맞다.
하지만 내가 고통스럽고, 나를 잃어버릴 지경임에도
여전히 상대를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구원 환상(rescue fantasy)을
가진 사람들이다.
구원 환상이란 돕고 싶다는 마음을 넘어
상대방의 삶에 유일한 구원자가 되고 싶어하는
무의식적 소망을 뜻한다.
그 아래에는 나에게 기대고 의존하는
상대의 모습을 통해 나 자신의 가치를
확인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숨어있다.
‘나라면 이 사람을 바꿀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은
얼핏 보기엔 오롯이 상대를 향한
헌신의 의지처럼 보이지만,
실은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과대한 이미지와
그것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바람이
함께 뒤섞여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 환상을 지닌 이들은
은연중에 자신이 상대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확인하고 싶어 한다.
상대가 자신에게 애정을 갈구하며
매달려 주기를 바란다.
두 사람
구원 환상을 지닌 사람과
배신에 대한 두려움으로 집착하는 사람이
만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처음에는 관계가 제법
잘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가 각자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불안해하는 사람은 심리적 안정을 찾을수록
상대방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이는 건강한 변화이지만,
구원 환상을 가진 이에게는 탐탁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자신이 떠날 것이라는 암시를 줌으로써
집착하는 이의 불안을 자극해
자신에게 다시 매달리도록 만든다.
집착으로 인해 괴로울지언정
자신이 상대방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걸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구원 환상을 가진 이는 만족한다.
결국 그들은 서로를 괴롭히는 동시에,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는
비틀린 관계를 이어나간다.
A씨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분들에게
‘스스로의 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내 마음에 상처를 내면서도
관계를 멈출 수 없다면
상대에게 구원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해봐야 한다.
내가 바라는 건 상대의 행복인가,
‘나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을’ 상대의 행복인가?
[문제적 연애] 시리즈
오동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가 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만드는 연애심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다양한 이야기 속에서, 당신에게 꼭 필요한 솔루션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편집자: 구자민)
필자: 오동훈
연세온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팟캐스트&유튜브 채널 <뇌부자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