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희생하는 유일한 사람

"저는 학교 다닐 때
제법 인기가 있는 편이었어요.
고백해 오는 사람이 꽤 많았는데
진심이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다 거절해버렸죠.

주변 사람들이 어떤 사람을 찾냐고 물으면
전 항상 '엄마처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라고 대답했어요.

결국 저는 서른이 넘도록
엄마처럼 저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는
그런 사랑만 기다리다가
연애도 결혼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P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엄마는 저를 30대 중반에 낳으셨어요.
하나밖에 없는 늦둥이 자식이라
제가 필요로 하는 건 뭐든 해주셨고,
사랑도 듬뿍 표현해 주셨어요.

반면에 아버지는 바쁘셔서
얼굴도 보기 힘들었고,
제가 초등학생 때
바람이 나서 가출하셨어요.
그 뒤로 얼굴 한번 못 봤죠."

“그랬군요. 엄마와의 관계가
각별할 수밖에 없겠네요.”

“엄마 없이는 이 세상을 살 자신이 없어요.
하지만 언젠간 엄마도 돌아가실 테니까...
지금은 제 생각이 잘못된 거 같아서
일부러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려고 하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진정한 독립이라는 것

P와 같은 고민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부모처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찾고 있지만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이는 누구나 부모에게
의존하며 자란다.
그러다 점차 부모의 도움 없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고,
자신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이 형성되면
한 명의 성인으로 자립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외형적인 독립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진정한 성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적절한 사랑과
관심을 받아야만
건강한 정신을 발달시킬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해주는 부모의 모습이
아이 속에 내재화되어
힘든 경험을 이겨낼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점차
부모의 지지가 없는 상황에서도
타인과 관계를 맺고
새로운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관계와 경험이 축적되면서
정신이 성숙해지면 자연스럽게
부모와 심리적으로 분리가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심리적 독립이다.

그런데 간혹 성인이 되어서도
심리적 독립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대표적으로 유년기에
부모와의 관계에서
강렬한 정서적 경험을 한 경우다.

이러한 정서적 경험은
부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것도 포함한다.

P는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은 동시에
어머니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받는,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P가 기댈 수 있었던 건
어머니뿐이었고, 혼자 남겨진 어머니 역시
하나뿐인 혈육인 P에게 분명
심적으로 의지를 하게 되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의 상처를 감싸고 지낸 시간이 길어지면서
P와 어머니는 두 사람의 관계를
심리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공동 운명체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어쩌면 P는 무의식적으로
여자와 교제하는 행위를
어머니를 '배신'하는 일로
여기고 있을지 모른다.
마치 아버지처럼.

 

감정의 소화

P는 본인의 문제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P가 고백한 것처럼
자신의 문제를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변화를 끌어내기 어렵다.

P의 경우에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관련된
해소되지 않은 감정들이
P가 스스로 의식하는 것 이상으로
내면에 깊이 억압되어 있을 것이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어머니에 대한
이상화(idealization)의 이면에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받아온 상처가 존재하지 않을까.

이러한 감정의 소화가
어머니와 같은 사람을 찾으려는,
비현실적인 소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첫걸음일 것이다.

치료를 통해 감정을 방출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기회를 갖는다면
문제의 해답에 빨리 가까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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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오동훈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소아정신과 전문의
연세온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팟캐스트&유튜브 채널 <뇌부자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