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의 고민
“저는 유통기한
3개월짜리 연애를 해요.”
잠시 숨을 고른 K가 이야기를 이어갔다.
“상대가 제게 관심이 없다고 느낄 때는
호감을 사려고 노력하다가
막상 제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면
상대를 멀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아요.
밀쳐내다가 나가떨어질 것 같으면
다시 붙잡고...
그렇다고 저한테 호감을 표시하면
그 사람이 더 싫어져요.
그럴 땐 일부러 상대를
화나게 하기 위해
비아냥거리는 말을 할 때도 많아요.”
“그렇군요. 상대는 보통 어떻게 반응을 하나요?”
“대개는 화를 내죠.
그러면 제가 상처를 받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려요.
가끔 끝까지 호감을 표시하는 사람이 있어
어찌어찌하다 사귀기도 해요.
그런데 그럴 때는
내가 상대를 만나는 데
확실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한테 비싼 선물을 사주든,
밥을 사주든,
하다못해 집 청소라도 해줘야 해요.
그리고 제가 싸울 때
화가 나서 물건을 던지거나,
상대를 때리더라도
상대방은 제게 화를 내면 안 돼요.
그러다 보니 연애가 3개월을 못 가고,
결국엔 이기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요.”
이야기를 마친 K가
씁쓸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저도 의도적으로
그러는 건 아니에요.
나도 모르는 사이 그렇게 행동하고
시간이 지난 후에 깨닫는 거죠.”
K의 이야기가 납득되지 않는 분들이
많이 계시리라 생각한다.
어떤 분들은 상대의 입장에 이입해
화가 나셨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심리는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방어기제라는 덫
K가 보이는 모습은
‘투사적 동일시(projective identification)’
라고 부르는 방어기제로 설명할 수 있다.
투사적 동일시란
‘자신의 내적 세계를
외적 대상에게 쏟아놓고
그 대상을 재내면화하는 과정’
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정신과 전공의 시절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개념이
바로 이것이었다.
아주 단순하게 풀어서 설명해 보겠다.
여기 A와 B 두 사람이 있다.
A는 자신을 아주 미워하고 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라,
이러한 감정을 B에게 전가하려고 한다.
즉, A를 미워하는 것은
A 자신이 아니라 B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인
‘투사(projection)’의 과정이다.
그런데 투사적 동일시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자신이 던진 부정적인 감정과
그 감정을 받아들인 대상을
실제로 결합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즉 A 혼자 B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
B가 정말로 A를 싫어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A는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A를 화나게 하기 위해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한다.
결국 참다못한 B는
A가 처음에 의도한 대로
A를 미워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모든 과정이
무의식의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A는 자신에게
이러한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B를 조종한다.
그리고 결국 B의 미움을 받는
‘피해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방어기제가 될 수 있단 거야?'
라는 생각이 든다면 지극히 정상이다.
그만큼 복잡한 개념이니까.
핵심은 자신을 미워하는 것보다는
타인의 미움을 받는 피해자가 되는 게
심리적인 고통을 덜 수 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미워하는 방법
결국 K의 마음속에는
스스로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런 감정은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엄마의 감정 기복이
지나치게 심해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극과 극을 오간다면
아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
안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지 못한다.
보통은 ‘좋은 모습과 나쁜 모습이 있지만
어쨌든 난 괜찮은 아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아이들은 스스로에 대해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칭찬과 인정을 받는다면
‘선한 나’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악한 나’가 된다.
결국 수시로 ‘악한 나’를 경험하며
그렇게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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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오동훈
연세온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팟캐스트&유튜브 채널 <뇌부자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